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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

DNN 2019. 4. 8. 00:32
가을이 졌다. 단풍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가을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지가 앙상하게 하늘을 향해 항의했다. 겨울이 왔다.
"다녀오겠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밀어 연 문틈으로 초겨울의 한기가 훅 들어왔다.
"아, 추워."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집을 빠져나와 아파트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찬 공기가 아파트 안에 가득 들어차있었고 연신 내 옷깃을 붙잡고 늘어졌다. 안 돼, 들어오지마. 추워.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찬 공기들이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작은 숫자판의 빨간 숫자 등이 점점 줄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1층에 도착했다. 뻥 뚫린 아파트 1층의 출입구에 더 많은 찬 공기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까지 합세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정류장까지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찬 공기들이 쉴 새 없이 얼굴에 부딪혔다. 여름 숲 속 작은 벌레들처럼 피부를 간지럽혔다. 금방이라도 얼굴을 다 뒤덮어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것처럼 나를 애워쌌다.

정류장에 도착해 발을 멈추어 서자 눈 앞에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와 주변의 온도차에 서서히 하늘로 사라지는 입김이. 여느 때와 같이 5분가량 남은 버스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오늘은 유독 야속했다. 4분 쯤 지나자 저 멀리 버스가 보였다. 파란색 흰색 뒤섞인 커다란 버스는 누구보다도 이 초겨울 아침에 쉬이 녹아들어, 여름에도 이 길을 오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만큼,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앞에 멈추어섰다. 버스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입구로 몰렸다. 가장 먼저 버스에 올라타 교통카드를 찍고 가장 맨 앞 좌석에 올라탔다. 저마다 여유롭게 버스 안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공기가 따스했다. 창문에 붙어있는 그 따스한 공기들은 유리 하나 너머의 찬 공기들이 신기한지 온 창문을 애워싸고 하얀 막을 만들어내었다. 창 밖이 흐리게 보였다. 공기들의 만남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저 멀리 걸어가는 누군가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옷 소매로 창문을 스윽 닦았다. 새까만 먼지가 소매에 뭍었지만 힐끗 쳐다보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저 멀리 누군가가 낯익었다.
"지서현!"
큰 소리로 부르자 그가 나를 향해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나도 씩 웃으며 손을 휙휙 흔들어보였다. 멀리 있어서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은 분명히 '이따 봐!'라고 말을 전했다. 새삼 나의 시력에 감사했다. 다시 창문을 닫고 눈을 감았다. 창문으로 흘러 들어온 찬 공기가 서서히 따스함에 물들었고 곧 안락해졌다.
"다음 정류장은... 고등학교입니다."
안내 음성에 반쯤 날 뒤덮고 있던 졸음이 조금 날아갔다. 미끄러지듯 자리에서 내려와 교통카드를 찍고 출입구 앞에 섰다. 조금 요란하게 버스가 멈추어서고 문이 열리자 기다렸던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내렸다.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겨우 버스에서 내리자 또 다시 찬 공기가 나를 맞았다. 잠이 싹 달아났다.

8시 23분. 교실에 들어서자 항상 8시 쯤 등교하는 반 친구 한 명이 언제나처럼 이어폰을 꽂고 제 자리에 앉아있었고 교실은 천장의 히터로 데워져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공기는 따스했지만, 의자까지 데우지는 못했나보다. 의자의 찬 기운이 낯설었다.
"안녕."
내가 인사하자 이어폰을 꽂고 있던 친구가 눈동자를 굴려 나를 보곤 손을 살짝 흔들어보였다. 입꼬리는 아마 살짝 올라가 있었던 것 같다.
8시 45분쯤 되자 아까 버스 창문 너머로 인사했던 서현이가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이~"
다른 친구에게 손을 흔들며 내쪽으로 걸어온 지현이가 두 손으로 내 책상을 쾅 짚었다.
"야, 내가 오는 길에..."
서현이의 말이 길어지자 나는 그의 가방을 건네 받아 내 옆자리에 걸어주었다. 서현이의 등굣길 일화는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실 때까지 이어졌다.

조례를 마치고 1교시를 알리는 종이 치자 조금 마음이 정리되었다. 오늘 아침은 여러 모로 바쁘고 복잡했다. 쉴새없이 오가는 아침 공기가 혼자 맞기엔 버거울 정도였다.

2019 04 08 월 00:24 작성완료

제목 한조(寒朝)라고 짓고싶은 거 정신차리고 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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